[이 아침에] 용기가 필요해
머리 염색할 날짜를 훨씬 넘겼다. 흰 머리카락은 정수리, 뒤통수, 옆머리와 앞머리를 가리지 않고 존재감을 보였다. 흰머리에 다른 색깔을 입히기 위한 독한 염색약을 바르는 일을 더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은 알고 보니 별일이었다. 개성이랄 게 별다른 게 있나 생긴 대로 사는 게 개성이지. 옷을 단정하게 입지 않았다거나 청결하지 않은 것은 문제겠지만 머리카락이 희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불쾌를 주거나 예의가 어긋나는 일이 내 생활에 있을까. 흰 머리카락을 나 스스로 인정할 수 있다면 별문제가 없지. 생각의 닻을 용기의 바다에 내려 보기로 했다. 미용실에 들러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자르기만 할 뿐이어서 새로운 머리카락은 각자의 색깔대로 용기 있게 자라났다. 6개월쯤 지나니 머리 모양이 이상하게 달라졌다. 위에서부터 하얀색으로 변한 머리카락은 위아래 중구난방이다. 바가지를 머리 위에 올려놓은 것 같이 하얀색과 검은색이 반으로 나뉘었다. 염색 안 하실 거예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말을 던진다. 말끝에 매달린 관심들은 흰머리에 대한 일종의 낯섦과 옅은 거부감으로 내게 부딪혀 닿았다. 눈이 파랗고 코가 오뚝한 백인 할머니들은 백발이 멋있어 보였다. 나도 그 흉내를 내 볼까 하는 생각도 있어 염색하지 않았다. 길을 가다가도 어른들의 머리카락을 신경 써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들의 얼굴 나이에 비해 머리카락은 인위적으로 검은 머리에 별 거부감이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은발 머리를 고집하는 것도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나는 얼굴보다 시간을 앞서 달리는 머리카락을 염색 안 할 거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고 나니 생긴 대로 살자던 마음도 휘청거린다. 휘청거리는 마음을 확인하듯 흰 머리카락을 들춰 본다. 옆머리를 보려고 좌우로 눈을 뾰족하게 뜬다. 앞머리에도 가닥가닥 흰 머리카락이 모여 있다. 휘청거리던 마음이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다. 몇 년 전 어느 모임에서 한 분이 은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뒤에서 보게 되었다. 머리카락 색깔도 은빛으로 빛났고 머리카락 영양 상태도 좋았고 머리카락 수도 많아 보기 좋았는데 그분이 지나가는 얼굴을 보고 어울리지 않는 머리 모양이라고 했었다. 나이 들수록 예뻐요, 잘 생겼어요. 보다는 어려 보여 요가 기분 좋은 덕담일 때가 많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젊어 혹은 어려 보이길 원한다. 이 사회는 젊고 어린 사람들에게 관대해서일까. 염색으로 흰머리를 감추고 눈가의 주름을 최대한 펴는 시술에 정성을 쏟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고령화와 저출산은 허공을 가르지도 못하는 비명이 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늙을 것이고 또 죽을 것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조금은 완곡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일 용기가 필요하다. 늙어가는 것을 피하지 말고 늙음으로써 새롭게 생긴 외모와 생활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모든 일에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나이 듦이라는 단어에 대해 성찰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면 그 과정은 나이 듦이기 때문이다. 나는 필요에 의한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늙을수록 더 필요한 용기 같다. 내 흰머리를 받아들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말할 수 있고 싫어하는 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 용기 말이다. 양주희 / 수필가이 아침에 용기 머리카락 색깔 머리카락 영양 머리카락 수도